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은 세상에 던져 진 타자 하나하나의 삶을 온전히 살아본 적 없는 또 다른 타자인 너는, 결코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아닌 타자들은 각자 나름의 얕은 생각들을 떠들고, 쓰며 무자비하게 배출해낸다. 따라서 이러한 내 사색이 혹여나 또 다른, 폭력의 목소리가 될까 경계하며 글을 써내려간다.

고작 한-두 세대만 지나도 잊혀져 버린 수많은 이름들 가운데 유달리 밝은 이들은 '무명'의 때가 있었다. 삼국지의 유비, 성경의 요셉이, 지금 내 손에 들린 덴마크 자유교육자 크리스튼 콜이 그러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때를 지나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거짓과 불의를 삼켜버리는 것과 얄팍한 허세와 자존심을 거부하려는,

영혼들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생각하면,

삶과 그것의 포기는 결코 같은 선에 설 수 없다는 차가운 시선들을 마주하면,

가슴 한 켠이 얼얼하다.

고사리 같은 손에 다양한 종류의 지구들을 묻히고 훌쩍거리는 코를 닦아 냈을 때, 우리가 아팠는가.

놀이터의 차디 찬 미끄럼틀을 각자의 열기로 따뜻하게 데워질 때까지 소리치며 놀았던 그 때, 우리가 아팠는가.

교실 뒷 편 사물함에 걸터앉아 어른의 발자국 소리에 한 쪽 귀만 열어두며 노닥거렸던 그 때, 우리가 아팠는가.

아픈 관절 인형 위, 손가락 10개.

나와 너의 사지를 걸고 위협적인 미소로 농락하는 세태라는 것에 우리의 고귀함을 넘겨주지 말자.

이것들과 여기에 지배당한 타자들의 속삭임이 우리로부터 자유를, 사랑을, 사유할 힘을 뺏고 있다.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다 견뎌 낸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기운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가진 애달프게 단단한 눈망울과 직관과 이성을 동시에 담은 미소가 좋다.

이들은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삶의 모습들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나를 구원해, 오직 넉넉함과 편안함으로 지금, 여기를 감싼다.

너, 계속 그 길 걸어라.

인생의 길을 버티고 버틴 자들의 이야기들은 다 아름다우니,

그 끝이 올 때 즈음에, 맑은 모과차 끓여 나누자.

그 때, 다시 온전한 지구를 손에 묻히고 훌쩍 거려보기도 하고,

소리치며 놀아보기도 하고,

두 쪽 귀 모두 연 채 노닥거려보기도 하자.

202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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