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이 도시를 덮치면서 지난 3주 간 학교가 불쾌하게 조용했다. 노란색 선을 따라 열을 재고 소독기에 손을 맡긴다. 칙: 출근을 알리는 소리. 반복되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우둔한 뇌는 너무 쉽게 적응해버렸다.
북쪽을 향한 탓인지 교실 문을 열자마자 특유의 눅눅함과 한기가 서로 나가겠다고 아우성이다. 정부가 지시한 건강상태 어플을 켜 '아니요' 3번을 누르고 커피를 내리러 연구실에 간다. 간혹 마스크를 내린 동료들의 얼굴이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주고 받은 날씨나 코로나 이야기보다 낯설다.
교실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어제 저녁, 학교에도 놀이터가 있다는 것에 한없이 기뻐했던 1학년들이 내복 차림으로 과제를 하고, 그 사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아이들은 이제 '경필'이라는 단어보다 '업로드'라는 단어가 익숙하고, '종이'보다 '테블릿 노트'의 촉감을 좋아한다. 2013년생 뱀띠들은 정말 안됐다.
인터넷 공간이 교육의 주 무대가 되자, 교사 전문성의 질과 방향이 도마 위에 올랐다. 나조차도 학년 공통의 수업 내용을 주간 학습안에 기록하면서 이 많은 영상에 노출되는 아이들이 염려스럽다. 도구로서의 영상을 아무리 최소화한들, 장소로서의 영상이 정말 교육을 가능하게 할까. 가만, 칠판과 지도안으로 공부 시킨 내 은사님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신걸까. 기술의 발전은 과연 교육혁명의 시작일까 퇴보의 원인일까. 모두가 처음인 이 사태에 사람들은 회피와 비난을 택한다. 참 쉽다. 갖가지 잡 생각들이 머리를 헤집어 놓을 때 즈음, 긴급돌봄 대상 학생들이 차례차례 교실에 들어온다.
일상의 주가 공부에서 일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 내 삶에 직접적인 변화가 그리 크지 않다. 집에서 가족과 매일 저녁을 함께 하니 안정감이 느껴지고, 외향과 내향을 넘나드는 이 몸뚱아리는 타인을 적절히 만나 에너지가 한껏 비축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을 대면한 지난 3개월 간, 나는 해와 바람을 골고루 맞아야 할 아이들에게 코로나가 더 혹독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케어가 가능한, 큰 나무들의 아이들은 성장했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아직 웅크리고 있다. 큰 나무들은 부모고, 그 뒤에 자리잡은 건 무서운 손, 자본이다. 누구도 잃어버린 세대가 되어선 안된다.
역병은 차이를 극대화시키고, 기존 교육의 여러 형태들을 무력화 시켰다. 내일이면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원격수업이기에 피드백이 불가하다는 방학 계획의 인사말이 부끄럽다. 보육이 아닌 교육은 어찌 가능한걸까. 과학경시대회에 그려 낸 미래의 교육은 모두 틀렸다. 교육은 서로의 호흡과 살갗이 부딪쳐야 가능하다.
문제-해결 구도의 아웃풋들은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겠거니만, 인간의 반복되는 이 오늘들엔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도 찾기 힘든 일이 많다. 그렇다고 마음을 다해 충분히 애도한들, 그 끝에 항상 빛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신뢰하던 이들의 주장이 곧은 신념일지, 억측스러운 망상일지, 잔꾀일지 아리송하기도 하다. 정인이, 코로나를 극복하지도 않았는데 떠들어대는 단어: 포스트코로나, 안전문자. 읽고 듣고 볼수록 주위의 모든 것들이 냉한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아쉽다.
부모에게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배운 따뜻함의 불씨가 여전히 힘이 있을거라고 믿으며 내 개인 짐들을 박스에 챙겨 담았다. 내일부터 방학이다. 분명 큰일이라고 떠들어놓고, 본질이 이기적인 인간 중 하나인지라, 막상 차에 타니 또 행복하다.
외부인도 내부인도 아닌 경계인으로 적은 이 글이 부디 누군가의 미간에는 닿지 않길.
2021.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