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리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어중간한 나이의 여자가 식당에 들어왔다. 아직 볼이 빨갛고 생글생글 주름이 살짝 든 눈가를 보자니, 서른을 갓 넘겨 보였다.

.

여자는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인 맛집에서, 소문난 세프가 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생각에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

.

이윽고 근사한 옷을 입은 웨이터가 메뉴판을 줬다. 형형색색의 음식 사진들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자의 고민이 길어지자, 식당에 있던 모두가 여자의 메뉴판을 강렬하게 보고 싶어했다. 한 회색 신사는 자기가 여기 와본 적이 있다며 거들먹거리고, 또 다른 신사들은 '세프추천'을 '점심특선'에만 먹어야 후회하지 않을거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저 멀리 앉은 노신사는 고민이 길어지는 여자가 안타깝다며 혀를 끌끌 찬다. 다시 오지 못할 식당이라 여자는 망설여졌다.

.

시간이 지나자, 여자의 형체와 목소리는 메뉴판 앞에 득달같이 모여든 인파에 떠밀려 사라졌다. 여자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가 죽은 듯이 책상에 엎드렸다.

.

.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리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어중간한 나이의 남자가 식당에 들어왔다.

.

회색 신사들의 번뜩이는 눈이 즉시, 남자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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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020.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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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 도시를 덮치면서 지난 3주 간 학교가 불쾌하게 조용했다. 노란색 선을 따라 열을 재고 소독기에 손을 맡긴다. 칙: 출근을 알리는 소리. 반복되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우둔한 뇌는 너무 쉽게 적응해버렸다.

북쪽을 향한 탓인지 교실 문을 열자마자 특유의 눅눅함과 한기가 서로 나가겠다고 아우성이다. 정부가 지시한 건강상태 어플을 켜 '아니요' 3번을 누르고 커피를 내리러 연구실에 간다. 간혹 마스크를 내린 동료들의 얼굴이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주고 받은 날씨나 코로나 이야기보다 낯설다.

교실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어제 저녁, 학교에도 놀이터가 있다는 것에 한없이 기뻐했던 1학년들이 내복 차림으로 과제를 하고, 그 사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아이들은 이제 '경필'이라는 단어보다 '업로드'라는 단어가 익숙하고, '종이'보다 '테블릿 노트'의 촉감을 좋아한다. 2013년생 뱀띠들은 정말 안됐다.

인터넷 공간이 교육의 주 무대가 되자, 교사 전문성의 질과 방향이 도마 위에 올랐다. 나조차도 학년 공통의 수업 내용을 주간 학습안에 기록하면서 이 많은 영상에 노출되는 아이들이 염려스럽다. 도구로서의 영상을 아무리 최소화한들, 장소로서의 영상이 정말 교육을 가능하게 할까. 가만, 칠판과 지도안으로 공부 시킨 내 은사님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신걸까. 기술의 발전은 과연 교육혁명의 시작일까 퇴보의 원인일까. 모두가 처음인 이 사태에 사람들은 회피와 비난을 택한다. 참 쉽다. 갖가지 잡 생각들이 머리를 헤집어 놓을 때 즈음, 긴급돌봄 대상 학생들이 차례차례 교실에 들어온다.

일상의 주가 공부에서 일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 내 삶에 직접적인 변화가 그리 크지 않다. 집에서 가족과 매일 저녁을 함께 하니 안정감이 느껴지고, 외향과 내향을 넘나드는 이 몸뚱아리는 타인을 적절히 만나 에너지가 한껏 비축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을 대면한 지난 3개월 간, 나는 해와 바람을 골고루 맞아야 할 아이들에게 코로나가 더 혹독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케어가 가능한, 큰 나무들의 아이들은 성장했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아직 웅크리고 있다. 큰 나무들은 부모고, 그 뒤에 자리잡은 건 무서운 손, 자본이다. 누구도 잃어버린 세대가 되어선 안된다.

역병은 차이를 극대화시키고, 기존 교육의 여러 형태들을 무력화 시켰다. 내일이면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원격수업이기에 피드백이 불가하다는 방학 계획의 인사말이 부끄럽다. 보육이 아닌 교육은 어찌 가능한걸까. 과학경시대회에 그려 낸 미래의 교육은 모두 틀렸다. 교육은 서로의 호흡과 살갗이 부딪쳐야 가능하다.

문제-해결 구도의 아웃풋들은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겠거니만, 인간의 반복되는 이 오늘들엔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도 찾기 힘든 일이 많다. 그렇다고 마음을 다해 충분히 애도한들, 그 끝에 항상 빛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신뢰하던 이들의 주장이 곧은 신념일지, 억측스러운 망상일지, 잔꾀일지 아리송하기도 하다. 정인이, 코로나를 극복하지도 않았는데 떠들어대는 단어: 포스트코로나, 안전문자. 읽고 듣고 볼수록 주위의 모든 것들이 냉한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아쉽다.

부모에게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배운 따뜻함의 불씨가 여전히 힘이 있을거라고 믿으며 내 개인 짐들을 박스에 챙겨 담았다. 내일부터 방학이다. 분명 큰일이라고 떠들어놓고, 본질이 이기적인 인간 중 하나인지라, 막상 차에 타니 또 행복하다.

외부인도 내부인도 아닌 경계인으로 적은 이 글이 부디 누군가의 미간에는 닿지 않길.

 

2021.01.07

역병이 가져다 준 시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좋든 싫든, 독수리가 하늘을 바라보듯 상황과 감정을 분리하는 연습을 했다. 에너지가 필요할 때는 꽤 오래 인간과의 컨택을 끊고 내 방에 몸을 숨겨, 신을 마주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강아지들과 나가는 산책도 위로가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안의 내가 비로소 사랑으로 충만해졌을 때, 사람을 만났다. 외향과 내향의 언저리를 부단히 서성이는 나. 나는 나를 참 잘 모른다.

Things unseen: 서른 살을 넘기면서, 마음에 큰 변화가 생겼다. 죽음의 실재가 서서히 느껴졌다. 친밀함의 거리와 상관없이 주위의 사람들의 생명이 사그라드는 것을 지켜보며 살 날에 대해서 생각했다. 항암치료로 척추가 말려질만큼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모습이,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곡기를 끊은 한 어미의 손가락이, 돈에 마음을 내 준 사람들의 허무한 목소리가, 매일같이 코로나를 외치는 뉴스 앵커의 표정 없는 얼굴이 내 앞에 놓여진 여러 날들을 상기시켜줬다. 내 삶이 지향하는 그 곳은 소명과 소망이다.

뒤엉킴을 견디기: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모든 순간이 스케쥴러에 적힌 일정대로 움직여야 마음이 편하다. 칸트야말로 나의 이상형이고, 이상이다. 2020년 내게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을 마주했다: 약속을 어긴 누군가, 결과적으로 뒤엉킨 스케쥴 따위. 올해는 부디 뒤엉켜도 늘 기뻐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엉망진창'을 견디는 훈련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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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분

'공감된' 분노는 각 구성원의 가치관 변화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사회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그러나, 과연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분노가 순수한가.

자본주의의 끝을 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생존 공포를 해소하고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적 타겟을 찾고 있다. 공분의 원인이 고차원적이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라 그 밀도가 촘촘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정인이 양부는 그의 빛나는 외제차 때문에 더욱 욕을 먹었다.

과연 이 분노가 지속적인가.

재판을 끝내고 나오는 정인이 양부모에게 시민들의 욕설과 고성이 세차게 떨어진다. 어떤 이는 분에 못 이겨 뒤로 쓰러지고 울부짖는다. 홈쇼핑 생방송 중에 한 연예인이 정인이 관련한 말실수를 했다. 그녀는 또 다른 분노의 타겟이 되었다. 우리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한다. 하루가 다 가기도 전에 수시로 바뀌는 네이버 인기검색어가 물증이다.

어디로, 어떻게 분노를 표출하는 지가 성숙한 시민을 나타내는 지표다. 공분은 정의로워야 하고, 지속되어야 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개인의 의도를 타인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기에, 타인으로서의 나는 TV 속 공분을 가진 개인들을 시니컬하게 보았다. 대단히 이기적인 공분들로 가득찬 세상 이야기들이 공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디 현재 들끓고 있는 아동학대에 대한 공분만큼은 정의롭길, 지속되길, 지혜롭길 바란다. 개인인 나도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예민함으로, 소리내지 못하는 아이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의무감으로.

이 곳은 정말이지, 살면 살수록 악하다.

2021.01.23 정인이 후속편, 그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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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은 세상에 던져 진 타자 하나하나의 삶을 온전히 살아본 적 없는 또 다른 타자인 너는, 결코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아닌 타자들은 각자 나름의 얕은 생각들을 떠들고, 쓰며 무자비하게 배출해낸다. 따라서 이러한 내 사색이 혹여나 또 다른, 폭력의 목소리가 될까 경계하며 글을 써내려간다.

고작 한-두 세대만 지나도 잊혀져 버린 수많은 이름들 가운데 유달리 밝은 이들은 '무명'의 때가 있었다. 삼국지의 유비, 성경의 요셉이, 지금 내 손에 들린 덴마크 자유교육자 크리스튼 콜이 그러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때를 지나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거짓과 불의를 삼켜버리는 것과 얄팍한 허세와 자존심을 거부하려는,

영혼들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생각하면,

삶과 그것의 포기는 결코 같은 선에 설 수 없다는 차가운 시선들을 마주하면,

가슴 한 켠이 얼얼하다.

고사리 같은 손에 다양한 종류의 지구들을 묻히고 훌쩍거리는 코를 닦아 냈을 때, 우리가 아팠는가.

놀이터의 차디 찬 미끄럼틀을 각자의 열기로 따뜻하게 데워질 때까지 소리치며 놀았던 그 때, 우리가 아팠는가.

교실 뒷 편 사물함에 걸터앉아 어른의 발자국 소리에 한 쪽 귀만 열어두며 노닥거렸던 그 때, 우리가 아팠는가.

아픈 관절 인형 위, 손가락 10개.

나와 너의 사지를 걸고 위협적인 미소로 농락하는 세태라는 것에 우리의 고귀함을 넘겨주지 말자.

이것들과 여기에 지배당한 타자들의 속삭임이 우리로부터 자유를, 사랑을, 사유할 힘을 뺏고 있다.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다 견뎌 낸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기운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가진 애달프게 단단한 눈망울과 직관과 이성을 동시에 담은 미소가 좋다.

이들은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삶의 모습들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나를 구원해, 오직 넉넉함과 편안함으로 지금, 여기를 감싼다.

너, 계속 그 길 걸어라.

인생의 길을 버티고 버틴 자들의 이야기들은 다 아름다우니,

그 끝이 올 때 즈음에, 맑은 모과차 끓여 나누자.

그 때, 다시 온전한 지구를 손에 묻히고 훌쩍 거려보기도 하고,

소리치며 놀아보기도 하고,

두 쪽 귀 모두 연 채 노닥거려보기도 하자.

202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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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정리.

독일에 있으면서 수입이 없었지만, 동시에 돈을 낭비하진 않았다. 사람마다 '쓸데 없는 것'의 정의가 다르다. 내 짐을 정리하며 보니, 나의 경우에는 추가적인 '아름다움'을 위한 물건들인 것 같다. 본질적인 목적을 위한 것 말고, 덧붙이면 좀 더 빛나게 해 주는 것들.

3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몇 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시골동네에 이방인으로 살면서, 매일같이 돌아갈 그 날을 기대하며 지냈다. '잠시 머묾'을 생각해서, 소비하지도, 쌓아두지도 않았다. 굳이 곧 버려야 할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여행자로서 타지에 머물면, 의미있는 것이 몇 개 남질 않는다. 타이밍 좋게도,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나의 미니멀리즘은 더 굳건해졌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심적으로 불안하고 분주했다. 최악이였다. 광야의 클라이맥스에서 나를 만든 신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처음의 마음을 잃고, 내 삶을 추가적으로 낫게 보일 것들에 동기를 내 준 것을 돌이키셨다. 돌이키심. 타인은 알지 못할, 나와 당신만 아는 은밀한 광야에서 당신의 선하심만 바라보게 하시고, 움직이지 않게 하셨다. 그리고 돌아보니, 별 것도 아닌 것에 드라마를 찍은 내가 영 부끄럽다. 성장이겠지. 각자의 광야를 지나고 있을 누군가와 나눌 것이 생겼다.

사람은 참 미련하다. 미니멀리즘이라고 물건은 쌓아두지 않으면서, 마음은 헛된 것들로 자꾸만 쌓아둔다. 내 진짜 고향에 돌아감을 기억하면, 여기서의 필요없는 부수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가 '굳이'로 상쇄된다. 당연하지만, 진짜 해야 할 것에 집중하게 된다. 금의환향 해야 하니까.

영어 단어 중 occupied 는 바쁜, 분주한이라는 뜻이고, preoccupied 는 차지됨, 혹은 빼앗김이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니 인간 빼고, 모든 것들이 인생을 알려주나. 심지어 영어 단어마저도. ㅋㅋ

2020.08.29. 1.40 p.m.

side note: 생각해보니, 내 미니멀리즘이 실현가능했던 이유가, 여기서 만난 좋은 분들 덕분인 것 같다. 많은 물건들을 그냥 주고 간 유학생들도 있고, 교민 중에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 분들도 있었다. 나의 만나와 메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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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우리 동네_지겐

버스에 탄 승객들의 눈이, 헬스장에 운동하러 온 사람들의 눈이, 캐셔 앞에 줄 서 있는 구매자들의 눈이 모두 스크린에 닿아 있다.

학부 시절, 음악교육 교수님께서 피아노 전공자들이 “상대적으로” 내성적인 사람들이 많다고 한 말씀이 기억난다. 관객을 대면하여 연주하는 다른 악기 전공자들과 달리, 피아니스트들은 피아노와 나의 관계에만 집중하기 때문이 그 이유였다.

문득 돌아보니 온통 스크린 지옥이다.

지금이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평화로운 시대라고들 하지만, 가끔 소름돋게 병적으로 보이는 건 나만 느끼는 건가.

2019.12.17 직원도, 손님도 스크린만 보고 있는 맥도날드에서.

p.s. 사족이지만, 뒤이어 교수님께서는 성악가들은 가장 직접적으로 관객을 대면하기에, 쇼맨십과 사교성이 "상대적으로" 좋은 그룹이라고 하셨다. (허나, 교수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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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버릇이 나쁜 학생을 만났던 적이 있다. 결국에는 고쳐져서 5학년으로 올려보냈다. 소문으로 익히 들어, 학기 초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아이에게는 도벽이라는 버릇 넘어 많은 굴곡진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나서, 내 신념으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그만둘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아이를 아이 자체로만 보니, 도벽이 없어졌다. 아이와 아이 부모가 고마워했다.

 

독일에서 3년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주위에 게이 친구들이 어쩌다보니 많아졌다. 게이인줄 몰랐는데, 점점 친해지면서 그들이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혐오 정서에 평생 노출되어 처음에는 어떻게 받아줘야 할 지를 몰랐다.

 

나에게 분명 동성애는 죄다. 죄였고 죄일 것이다. 내 가치관이고 흔들릴 수 없는 신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들을 동성애자로만 보이지 않는다. 동성애라는 정체성 말고도, 그들에게는 수많은 다양한 정체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딸이고, 케이팝을 좋아하기도 하고, 대학에서 교육을 전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게이 친구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나에게 동성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지만, 니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너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 처럼, 너 또한 이런 신념을 가진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했다.

 

그 죄를 이길 수 없다면 피하라고 했다. 죄는 피하지만, 죄인까지 피해야하나. 그럼 누가 죄인이 아닌가. 나는 죄인이 아닌가. 동성애자라는 죄인이기 이전에 그들도 사람이고, 이성애자라는 사람이기 이전에 나는 죄인이다. 동성애와 내가 매일 짓고 있는 죄가 그렇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죄는 합의될 수 없기에, 매일매일의 나도 혐오스럽다.

 

좋은 관계를 바탕으로 게이라는 이슈가 언급될 때마다 내 입장을 분명히 한다. 싸우지 않는다. 선한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언젠가 그들이 들으려고 할 때, 내가 알고 있는 굿 뉴스를 말해주고 싶다. 내가 포기하거나, 그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 저버리면 이 관계는 끝이 난다. 현재로썬, 지금 여기 우리가 서로를 다른 여러개의 자아들로 구성된 '인간으로서' 존중한다는 것에 집중한다.

 

지인이 차별반대법에 관한 링크를 보내주셨다. 이 반대 운동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관을 당당하게 말하고 존중받고 싶은거라고 생각하기에, 반대 버튼을 클릭했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하나님 말씀앞에서의 자기 반성과 이웃 사랑.. 나에겐 이것이 중요하다. 성경지식이 많질 않아 정확히 잘 모르지만, 아무튼 혐오는 아닌 것 같다. 죄는 죄고, 사람은 사람이다.

 

p.s. 본인(목회자 제외)은 성경을 주석까지 찾아보기에 자꾸만 가르칠 것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은 부담스러워 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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